아직도 어린아이

지난 시간에 새로운 것을 시도하지 않는 숨은 이유, 근본적인 이유가 실패에 대한 두려움 때문이라고 말씀드렸습니다. 그러면 우리는 왜 이렇게 실패를 두려워하는 걸까요?

사실 실패할 때 실패하더라도 시도는 해보는 것이 더 합리적이지 않을까요? 우리 조상들이 배가 고파서 사냥감을 잡고 싶은데, 실패할지도 몰라서 시도를 안 한다, 그러면 어떻게 되었겠습니까? 굶어 죽었겠지요. 그러니까 실패할지도 모르지만 시도는 해보는 것이 맞는 것이고, 그렇게 시도하는 개체만 살아서 유전자를 남겼겠지요. 그런데 그 자손인 우리는 왜 다들 이렇게 시도도 안 해보고 지레 겁먹고 포기하고 그럴까요?

이런 비합리적인 두려움은 실은 우리의 유년기에 형성되었습니다. 사람은 사회적 동물이라서 다른 사람들에게 인정을 받는 것이 매우 중요합니다. 어린 시절에는 그 다른 사람들 중에서 부모가 절대적인 비중을 차지합니다. 그런데 부모가 기준이 높으면 어지간히 잘해도 성이 안 차겠지요? 우리 아이는 천재라면서 나이에 적합하지 않은 장난감을 사주고, 한창 놀면서 신체감각을 발전시켜 나갈 그 나이에 한글 자모나 알파벳 같은 것을 가르치려고 하고 그러면 아이는 어떻게 될까요? 아이가 부모의 기대에 못 미치는 반응을 보였을 때, 부모의 실망이 말이나 행동으로 나타나거나 그렇지는 않더라도 표정 같은 형태로 아이에게 전달될 겁니다. 부모의 인정을 받지 못하는 것은 아이의 심리에서는 생사여부가 달린 중차대한 문제입니다. 무언가 새로운 영역을 직면했을 때 그 마음의 부담, 잘하지 못해서 부모님의 인정, 칭찬, 웃음을 받아내지 못하면 어쩌나 하는 두려움이 아이를 압도합니다. 그래서 아이는 새로운 것을 잘 시도하지 않으려고 합니다. 이미 할 수 있는 일, 늘 해오던 일만 반복하려고 하게 되지요.

제 채널이 무슨 육아 채널도 아니고, 성인인 우리 문제의 원인을 몇십 년 전 부모님의 탓으로 돌리려고 이런 말씀을 드리는 것도 아닙니다. 제가 말씀드리는 요점은 우리의 두려움이 어릴 적에 형성된 것이고, 그리고 그 당시에는 그 두려움이 나름 합리적인 두려움이었다는 것입니다. 아이에게는 매우 중요한 문제였으니까요. 하지만 지금은 어떻습니까? 그 두려움은 지금도 합리적일까요? 전혀 합리적이지 않습니다. 우리는 부모님의 인정을 필요로 하지 않는 성인입니다.

그러면 뭡니까. 우리의 마음속에 숨어 있는 이 두려움은 유아기적인 두려움이며 더 이상 우리 생존에, 우리의 삶에, 우리가 살아가고 번성하고 행복해지는 데 유용하지 않은 그런 두려움입니다. 그런데도 이 유아기적 두려움이 지금은 성인이 된 이 시점에, 몸도 환경도 완전히 달라진 이 시점에 여전히 남아 있는 것이지요. 사실 성인이 된 우리의 삶에서 시도했다가 실패했다고 해서 큰일 나는 것 없습니다. 그런 것 거의 없습니다. 실패할 때 실패하더라도 한번 질러보는 것이 훨씬 더 합리적입니다. 그런데도 우리 마음속에 아직도 남아 있는 이 철 지난 두려움이 우리 발목을 잡고 있는 겁니다. 그런 면에서 우리는 아직도 다 어린아이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