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지털 풍요의 시대

인생은 선택의 연속입니다. 작은 선택들이 쌓여서 인생이 된다고들 하고요.
그런데 선택은 왜 하는 것일까요?

선택은요, 우리 인생이 유한하고 세상의 자원도 유한하기 때문에 하는 겁니다. 몸이 하나뿐이니 그날 입을 옷과 신발도 한 종류씩만 선택하는 거지요. 오늘 점심을 두 번 먹을 수 없으니 메뉴에서 하나를 골라야 합니다. 내 인생이 한 번뿐이니 한 여자랑만 결혼할 수 있는 거고요.

여기서 선택의 본질은 하나를 취하고 나머지는 포기하는 겁니다. 버리는 겁니다. 그게 선택의 엄중한 결과입니다. 그래서 선택은 힘듭니다. 하지만 일단 선택하고 나면 길이 분명해지고 마음이 안도가 됩니다.

그런데 요즘 디지털 세상에서는요, 우리 인생은 여전히 유한한데 자원의 유한성이 없어졌습니다. 모든 것이 사실상 공짜에 가까울 정도로 싸졌기 때문입니다. 저는 어릴 때 1년에 영화 한 편 보기도 쉽지 않았는데요, 요즘은 스트리밍 서비스 하나만 신청해도 24시간 내내 영화를 볼 수 있습니다. 음악은요? 거의 공짜로 들을 수 있는 음악도 사실상 무한정입니다. 유튜브 비디오는요? 보고 또 봐도 또 다른 볼 것을 끝없이 추천해 줍니다.

그리고 이런 디지털 풍요의 시대에는 선택지가 무한할 뿐만 아니라 선택의 엄중한 결과란 것도 없습니다. 넷플릭스에서 어떤 영화를 봤다고 해서 이어서 또 다른 영화를 보지 못하란 법이 없잖아요. 하나를 선택했다고 나머지를 포기하고 버리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니 선택의 엄중한 결과란 것이 없죠. 선택의 무게가 솜털처럼 가벼워졌습니다. 이것은 우리가 디지털 풍요의 시대에 살고 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런데 이런 디지털 풍요의 시대에 우리는 과연 행복해졌을까요? 여러분은 선택지가 많아서 즐거운가요? 하나를 선택하고 나서 또 다른 것을 또 선택하고 그다음에 또 다른 것을 선택할 수 있어서 풍요로운가요? 저는 별로 그런 것 같지 않습니다. 일 년에 겨우 영화 한 번 보러 극장에 갈 때는 들어가기 전부터 설레어서 가슴이 콩닥콩닥 뛰었지만, 클릭 두어 번으로 10시간을 내리 볼 수 있는 영화, 드라마, 영화, 드라마, 영화는 두통과 요통과 무기력을 안겨줍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여기서 희생되는 것은 우리의 시간입니다. 하나뿐인 우리 인생이 그다지 중요하지도 않은 것에 허비되는 것이지요.

디지털 풍요의 시대, 선택이 솜털처럼 가벼워진 시대, 이건 아주 위험한 겁니다. 조심하십시오.